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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용서

세컨드 라이프의 희망여행 2025. 5. 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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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설픈 지식의 습득으로 다른 사람들 삶의 범위를 침범하는 것은 오히려 문맹자 보다 못할 수가 있다. 사회의 악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벌하는 것을 세상이 용서해 줄 것이라는 자기만의 짧은 논리를 앞세워 사채업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욕심생이 할망구를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 (도스토예스키의 '죄와 벌')는 자신의 당당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편에서 죄어오는 죄의식으로 고통을 받다 결국 자수하면서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자신의 논리보다 가슴속에서 솟아 나오는 죄의식의 감정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많은 죄를 짓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이유로 그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매번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사회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모두의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하여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법과 원칙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그리고 이를 어기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 명명하고 처벌을 감수하고자 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 속에는 자신들이 정해놓은 법과 원칙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 속에 있는 자기만의 원칙과 신념도 어찌 보면 규범이 될 수 있다. 타인의 강요에 의하여 지켜야 하는 것과 스스로가 정한 가치에 대한 규범의 준수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대 신학사상에서는 신에대한 불복종을 '죄'라고 하였다. 하지만 대개의 우리는 이것에 거부감을 나타낸다. 절실한 신앙인이 아닌 이상 납득의 난해함이 있고,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습관처럼 말하는 죄의 사함을 받으려면 신을 믿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신에게 복종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에 대한 복종이 무조건적이지는 않지만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는 신에 대한 우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신에 대한 복종을 당연시하고 있다. 하지만 신들의 세상에서도 불복종의 예는 있었다. 인간에게 불을 주지 말라고 한 제우스의 명령을 거부하고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는 원칙을 지키지 않는 죄를 범하였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라스콜리니코프의 행동과 프로메테우스의 행동에는 차이가 있지만 죄의식의 감정여부가 달랐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를 짓고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 하고는 또 다른 논쟁이 필요하다. 해석과 이해의 문제라는 것이다.
요즘 법을 집행하는 기관의 행태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법과 원칙을 준수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집행하고 있다고 하지만 어쩐지 세인들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이 해석하고 판단한다는 전제를 안고 이해를 구해보지만 공평성의 문제는 피해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차치하고라도 일단'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잘못한 것 하고 죄를 짓는것 하고는 엄연히 다르다. 잘못은 바로 잡아가면 된다. 하지만 죄를 짓고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용서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도 인간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 대두되고 있는 법의 해석과 판단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고 이에 합당한 이유로 이해를 구하고자 함이다. 납득을 요하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원칙과 규범에 대해 복종을 해야 한다. 법과 원칙을 지킨다는 것과 복종을 한다는 것의 차이를 우리는 오해를 하고 있다. 어감적인 부분이 아니라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복종의 굴레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나타낼 수도 있다.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규범과 원칙의 범위안에서 만큼은 인정을 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죄에 대한 벌칙의 수행이 아니라  죄를 짓게 되면 죄의식을 갖게 되고 불복종에 대한 반성으로 새로운 복종의 세계로 들어와야 용서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죄의식을 벗어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각자마다의 기준과 생각들이 다름으로써 세상의 원칙이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다.
오늘을 열심히 살지 않음도 어쩌면 죄를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은 내안에 있다. 날마다 만족할 만한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죄의식까지는 가질 필요는 없다. 죄는 죄의식을 동반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기준이지만 라스콜라니 코프가 생각한 것과 실제 죄를 짓고 난 후의 감정이 다름에서 우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했고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 세상이 용서하지만 스스로가 갖고 있는 죄의식은 본인만이 용서할 수 있다. 열심히 살지 못한 죄의식, 만약에 라는 단어를 불러들였다는 죄의식, 내일에 대한 희망을 그리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을 키웠던 오늘 이기에 나는 당당하게 재판에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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