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라이프의 희망여행

열정의 씨앗은 그때부터 움트기 시작했다.

세컨드 라이프의 희망여행 2025. 4. 14. 00:17
728x90
반응형
SMALL

  인간은 스스로가 나약하기 때문에 무리를 이루어 상호 협조하면서 살아가는 동물이다. 이러한 생존전략에 의해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회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존재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비난하기보다는 그들만의 리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술수를 부리고 있는 모습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내가 살고 있는 조그마한 섬이 전부인 줄로만 알았다. 서해안 끝자락 작은 섬에서 태어나 육지에 대한 동경을 할 수도 없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문명의 혜택을 누리니 못한다 하더라도 비교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떠한 불평이나 불만을 가지지 않았었다. 

'둘만낳아 잘 기르자' 라는 표어를 가슴에 달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베이비 붐' 시대라고 불러지던 1970년대에서 1985년도 까지는 그랬었다. 그래도 섬이라고는 하지만 국민학교가 분교를 포함하여 세군데가 있었고 중학교는 한 반에 60명이 넘는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배움에 대한 열정을 키워갔다. 국민학교 동창이 중학교 동창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을 각자마다 그리고 있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내가 경쟁해야 하는 대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아직 열정의 불을 지피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선생님과 부모님은 동네 이웃으로 지냈고 명절이나 잔칫날 돼지라도 잡게 되면 신선한 목살 한 근으로 촌지를 대신하던 그런 시절의 추억을 지금의 치맛바람이라고 한다면 그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런 부모님 덕분으로 반장이라도 하게 되면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지어 보이곤 했다. 1등과 2등으로 인생의 성공척도를 정하던 시절이었기에 내 삶의 경쟁자는 오직 내 옆에 앉아있는 친구가 전부였고 함께 공부하기보다는 함께 놀러 가는 것으로 나의 미래를 준비하던 그 시절이 이제는 그립기도 하다. 

우리가 보았거나 들은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동경을 하게 된다. 현재의 경기장이 내가 지켜내야 하는 게임이라며 넓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없던 시절에 대한 회상이 지금은 사치가 되어버린듯 하다. 육지에서 하루 두 번 오가는 여객선이 내가 사는 이곳 너머에도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유일한 증거이다. 엄청난 소음을 내며 세 시간 정도를 달린 여객선은 부두에 직접 접안을 하지 못하고 먼바다에서 작은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실었던 짐들을 내려놓는 광경을 보면서 그나마 육지에 대한 동경을 그리기도 했다. 어쩌다 부모님이 육지에 다녀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세상의 신 문물을 구경할 수 있어서 설렘의 발길은 벌써 선착장에 가있었다. 제사음식을 준비하러 육지에 다녀오신 부모님은 잊지 않고 알사탕을 챙겨 오시고 볼이 터져라 입에 물고 리어카에 물건을 싣고 왔던 기억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그때 보았던 바나나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서 빨리 제삿날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시간이 더디 가는 것에 대한 조바심을 아직도 기억한다.

토요일이면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종례를 했다. 동네별로 애향단 활동을 하던 시절이어서 모두가 함께 줄을 지어서 하교를 해야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는 왜 그렇게 길었는지, 그리고 날씨는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지만 교문을 벗어나는 순간 대열은 흩어지고 각자의 아지트로 달려가는 것이 우리들의 그때 모습이었다. 산등성이 양지바른 곳의 묘뚱은 미끄럼틀로 변하고 동네 앞의 저수지에는 사람 반 고기반의 모습으로 변하는 건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우리들의 유일한 아지트인 저수지는 친근한 놀이터 이면서도 우리들을 삼키려 드는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보이는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여름방학식을 마치고 하교하던 날 더운 날씨에 준비운동도 없이 갑자기 저수지에 뛰어 들어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친구들도 있었다. 왜 그때는 조심하라는 둥 준비운동 철저히 하라는 둥 의 잔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세상에 대한 어른들의 가르침은 순수함보다도 무지에 가까울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때는 지금보다는 덜 더웠던 것 같고, 지금 보다는 눈이 많이 왔던 것 같다.

부모님들은 농사일을 하면서 우리들을 삶의 현장으로 끌어 들였다. 공부보다는 농사일과 동물을 보살피는 일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특히나 우리 부모님의 생활력은 남달라서 다른 집은 하지 않는 김 농사까지 하면서 다른 친구들은 마을회관 공터에서 구슬치기나 자전거를 타고 놀 때면 나는 부모님을 따라 밭에서, 창고에서 일을 해야 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은 것을 보면 그나마 나는 착실한 아이였던 것 같다. 소를 몰고 산으로 가는 경우에는 소나무를 꺾어만든 이순신 장군의 칼보다 더 멋진 보검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하거나 집에서 몰래 훔쳐온 쌀을 구워 먹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 소는 남의 밭에 있는 농작물을 훔쳐 뜯고 있었고 어김없이 마을 어귀에서 소리치는 밭주인의 목소리는 온 동네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세상은 산과 들과 바다였다. 조릿대로 만든 낚시에는 소질이 없었다. 낚시보다는 갯벌에서 미끄럼이나 수영을 하면서 노는것이 더 좋았다. 온몸에 갯벌을 묻히고 돌아오는 우리는 혼나는 것에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매번 혼날 때마다 억울함이 들었던 것은 순수함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지혜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갯벌에 놀러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손에는 주전자나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지금은 칠게하고 하는 게를 잡아서 오거나 해파리를 담아 오거나 바다고동이나 백합등을 캐서 돌아오면 그나마 혼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삶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 모기장 가지고 새우를 잡는 것은 엄마들 하고 같이 협업을 해야 했다. 뱃길이라고 표식으로 박아놓은 대나무를 캐내어 튜브대신에 수영하고 놀다가 혼나기고 하고 깊은 고랑을 향하여 배를 깔고 미끄럼을 타다가 박혀있는 조개조각에 배를 긁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상처는 금방 아물었고 상처도 남지 않았던 것은 바닷물의 염분이 소독약 역할을 한 것 같다.

 

728x90
반응형
LIST